HOME MUSEUM 가슴 깊이 되새기며
조끼 한 벌에 담긴 순박하고 다정한 마음

정세영 회장님은 한 마디로 심성이 고운 사람이요 착한 사람이었다. 대기업의 CEO라고 하면 보통 엄격함과 카리스마를 생각하게 되는데, 정 회장님은 유연함과 다정함이 더 돋보이는 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 회장님에게 CEO다운 카리스마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기업가나 경영자와는 다른 성격과 컬러를 지닌 분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현대건설의 신입사원 때부터 정세영 회장님을 자주 만났다. 처음에는 내 직급이 낮아서 아주 가까이는 뵙기가 어려웠지만, 내가 임원이 되고 또 다른 계열사의 최고경영자가 된 후부터는 편안한 사석(私席)에서 만나는 일이 많았다. 정 회장님이 특유의 다정함을 지닌 분이기에, 나는 그 같은 자리가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기업을 경영하다보면 남다른 고민과 스트레스에 빠질 때가 많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도 많고, 그 결정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오랜 경영자 생활 속에서 나 또한 항상 그 같은 일의 연속이었고, 정세영 회장님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정 회장님은 현대자동차와 그룹 회장을 겸하고 있던 시기에 여러 가지 심적인 어려움을 많이 느끼신 듯하다. 그건 정 회장님의 능력이 부족한 때문이 아니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대 기업과 자동차 회사 경영의 중책을 맡았기에 당연히 느끼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정 회장님은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전화를 걸어왔고, 우리는 일식집 간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곤 했다. 정 회장님은 나에게 이런저런 어려움을 털어 놓았고, 나는 진정으로 위로하고 같이 걱정하였다. 다행히 그 짧은 식사 시간의 대화가 정 회장님의 스트레스를 더는 데 도움이 되는 듯 보였다. 나는 처음 만날 때와는 달리 다소 밝은 얼굴로 헤어짐의 악수를 나누는 정 회장님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나 또한 회사 일로 느낀 피로감이 덩달아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인연 속에서 정 회장님은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내게 주었다.
우리는 주로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날도 우리는 이런저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정 회장님은 그날따라 특별히 기분 전환이 되신 모양인지, 헤어질 무렵에는 그 선한 얼굴 가득히 미소를 담고 있었다.
식당을 나온 후 정 회장님은 난데없이 내 손을 잡고 롯데백화점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을 안 하더니, 결국 나를 신사복 판매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거 어때, 이 회장?” 정 회장님의 손에는 캐시미어 조끼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나는 그냥 괜찮아 보인다고 대답을 했고, 정 회장님은 곧바로 그 조끼를 구입했다. 그리고는 조끼가 든 봉투를 나에게 건네주시는 것이 아닌가.
정 회장님은 식당을 나오는 순간 무언가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그렇듯 직접 고른 조끼에 담아 주신 것이다.
나는 그 조끼를 입을 때마다 정 회장님의 그 순박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조끼는 겉옷을 입지 않고도 혹한을 이길 만큼, 어떤 외투나 코트보다도 더 따뜻했다.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우리의 사표(師表)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역사에서 정세영 회장님의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 고유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 분의 선견지명(先見之明)과 추진력은, 단순 조립 단계에 있던 우리 자동차산업을 일순간에 세계 16번째 자동차 생산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모두가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일이었고, 그래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실패했을 때 돌아올 타격이 얼마나 큰 지는 정 회장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 또한 남모르는 고뇌와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 회장님은 그 두려움을 끝내 도전과 성취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과 같이 세계적인 수준의 자동차 생산국의 위상이다. 다정하고 순박한
측면 뒤에 그러한 추진력과 결단력이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업가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정세영 회장님의 투명한 경영 또한 모든 기업가의 귀감(龜鑑)이었다. 정 회장님은 비리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는 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따라서 편법을 쓰거나 적당히 넘어가는 식의 경영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진취적이고 모범적인 기업인이셨기에, 너무 일찍 세상을 뜨신 일이 가슴 아프기 한이 없다. 해마다 연초에는 설악산 대청봉에도 오르고 여전히 수상스키도 즐기시는 듯하여, 부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셔서 후배 경영인들과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되어 주시길 바랐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정 회장님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그 분의 삶과 철학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모범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한 사표(師表)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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