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USEUM 가슴 깊이 되새기며
현대자동차라는 새로운 세계로 비행(飛行)하며

나는 27살의 비교적 뒤늦은 나이에 공채사원으로 현대건설(現代建設)에 입사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태국(泰國)과 월남(越南) 등 동남아 진출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입사 직후 삼척발전소 현장에서부터 오산비행장, 한국비료를 거쳐 본사 공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당시 정주영(鄭周永) 회장님께서는 나에게 태국 현지로 나갈 것을 권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집안 사정을 핑계 대며 그 일을 미루고 있었고, 대신 이명박(李明博) 사원을 추천하여 태국 현장에 보냈었다.
당시에 현대건설은 해외공사로서 태국뿐 아니라 월남에 준설공사와 미8군 세탁전문회사인 KB KIM LAUNDRY사와 주월 미군의 모든 세탁을 맡아 운영할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진출 준비중이었으며 또한 캄란 소도시 건설 수주에 성공 가능성이 보일 시점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정주영 회장님은 아침 출근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자 곧바로 월남에 갈 것을 명하여 이 합작사의 현대측 대표인 정세영 회장님과 함께 나는 현지 파견할 세탁기술자들의 면접을 맡았었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정세영 회장님과 나의 만남의 첫 인연이었다.
20여 개월의 월남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귀국한 것이 1968년 여름이었고 당시 경부고속도로가 막 착공되어 서울 ─ 수원 공구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시기였다.
당시 나는 공무부장으로서 공사관리 현장지원에 밤낮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현대가 수원에서 오산, 오산에서 천안, 대전에서 옥천 구간 이렇게 경부고속도로 428Km중 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공사를 거의 마무리 해 가는 어느 날, 정주영 회장님의 갑작스런 부름을 받아 급히 회장실로 올라가 보니 정주영 회장님 방에는 당시 현대자동차 정세영 사장님이 앉아 있었다.
“이 부장, 자네 자동차로 가!”
이것이 정주영 회장님의 지시였다. 갑작스럽게 현대자동차로 자리를 옮기라는 말에 나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승용차인 코티나의 경우 거친 비포장도로가 많았던 당시 도로 여건 때문에 판매한 차가 차체의 파손과 고장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트럭인 D750시리즈의 경우 화물차 차주(車主)들이 적재적량(積載適量)을 훨씬 초과하는 화물을 싣는 바람에 자주 고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때문에 현대자동차가 ‘깨지는 차’를 판다고 소문이 나기까지 했고, 결국 경쟁사인 신진자동차(新進自動車)에게 갈수록 시장을 내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차를 할부로 판 후 그 할부대금이 제대로 수금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회사 내부에서조차 “차를 팔 줄만 알고 돈을 거둘 줄은 모른다”는 자조적인 말이 나오고 있었다.
이 같은 어려움을 안고 있는 현대자동차에 가서 급한 불을 끄는 소방수 역할을 하라는 것이 정주영 회장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 못 갑니다”라고 거절을 했다. 오래도록 건설 현장에 있던 나로서는 자동차에 관한 일이 도무지 생리에 맞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님은 여러 가지 상황을 들어서 나를 설득했고, 결국 이렇게 잘라 말했다.
“딱 두 달만 있어! 내일 아침 7시까지 김포공항으로 나와!”
나는 다음 날인 1969년 12월 9일 이른 아침에 공항에 도착하여 정주영 회장님과 함께 김해공항을 향해 출발하였다. 나로서는 그것이 딱 두달이 아닌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현대자동차라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비행이었다. 그리고 그 비행의 도착지에는 정세영 사장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자동차를 위해 살았던 도전과 의지의 삶

그렇게 시작된 현대자동차에서의 하루하루는 실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 이후 계속되는 불경기 속에서 자동차가 제대로 판매될 리 없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의 전체 종업원은 3,400여 명에 달하고 있어서, 회사 경영을 압박하는 최대 요인이 되고 있었다.
내가 현대자동차로 옮겨 온 직후부터 대규모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7개월 만에 종업원 수를 700명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진통도 없지 않았지만, 회사를 살리고 남은 근로자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공장장 직을 맡고 있던 나는 그 고난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아침에 해고 근로자가 식칼을 들고 나타나서 협박을 하는 일까지 겪으며, 우리는 그 시련을 이겨내고 또 다른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1972년 포드와의 합작 결렬 이후 정세영 회장님은 마침내 독자적인 고유모델 생산이라는 모험에 도전하였다.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장차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의 역사를 바꿀 예지(叡智)였고 선견(先見)이었다.
정 회장님은 당시 이탈리아에 자동차 설계를 대행하는 용역회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회사내 기술진 몇몇을 데리고 탐색여행을 떠났다. 이로써 아직 자동차 독자 설계나 생산에 대한 인식이 전무(全無)했던 당시에, 현대자동차는 자동차에 관한 인식과 개념을 정립하는 새로운 경험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경험을 가능하게 했던 분이 바로 고유모델의 도전을 시작한 정세영 회장님이었다.
그 매 순간은 모두 중요한 결단과 판단의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결단과 판단을 주도한 정 회장님의 남다른 능력이 마침내 ‘포니 신화(神話)’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중화학공업육성 방안의 일환으로 자동차 고유모델 생산을 고려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고유모델이어야 할 것, 5만 대 이상의 양산(量産)이 가능할 것, 그리고 배기량 1,500CC 이하의 소형차일 것, 가격이 2,000달러 이하일 것 등의 조건이 달려 있었다. 이 가운데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가 생산한 차를 수출해야 한다는 조건은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였다. 자동차를 생산할 능력도 없는 게 국내 기술 수준의 현주소인데, 장차 무슨 수로 외국 시장에 내다 판다는 것인가.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일시에 가능한 상황으로 만든 것이 바로 정세영 회장님이었다. 만약 독자적인 고유모델 생산이라는 정 회장님의 위대한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의 기반을 놓은 정세영 회장님은 그 이후에도 오직 자동차만을 위해 살았던 분이다. 자동차산업은 복잡한 부품산업인 동시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궂은일이다. 그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당신의 인생을 바친 정세영 회장님 덕분에 현대자동차는 물론 현대그룹의 성장, 나아가 국가의 발전도 가능했던 것이다.
정세영 회장님과 나는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선후배 사이로서의 인연도 깊다. 나는 그 분이 교우회장을 맡아 교우회관(校友會館)을 건립하던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자신이 거액의 후원금을 낸 것은 물론, 다른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어렵게 후원금을 모금하여 마침내 그 숙원 사업을 이루어 낸 것을 보고 나는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힘이 바로 정 회장님 특유의 순박함과 인간미에 있다고 생각한다.
당초 ‘두 달만 있으라’는 정주영 회장님의 지시와는 달리 나는 1990년 퇴사할 때까지 2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현대자동차와 함께 했다. ‘2개월이 20년이 된’ 그 시간 동안 정세영 회장님과 함께였다는 사실이 나는 항상 가슴 뿌듯하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두고 나올 때 정세영 회장님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다. 평소에 내가 가장 싫은 소리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의 충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정 회장님은 잘 알고 있었다. 내 마음을 이해해 주고, 눈물로 나를 송별(送別)하던 그 마음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예전에 현대자동차는 신입사원이 입사하면 설악산 대청봉 정상을 오르는 극기 훈련을 실시했다. 당시에는 한 해 1,000여 명씩이나 되는 사원을 뽑을 때였으므로,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된 모습으로 산에 오르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 장관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정 회장님이셨다.
지금도 나는 1월 1일 새해 첫날에 정 회장님과 함께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엄동설한에 19시간이 넘는 대장정(大長征)을 하면서도 결코 흐트러짐이 없는 분이었다.
오히려 누가 곁에서 팔이라도 잡아 주려고 하면 거절을 하고, 끝까지 자신의 의지와 강한 모습을 잃지 않던 그 모습을 기억한다. 그렇게 좌절을 모르는 모습 속에 소탈하고 순박함을 담고 있던 분이었다.

삼가 고인의 영복(永福)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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