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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동차산업 발전의 밑거름이 된 공존공영(共存共榮)의 정신

정세영 회장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거래업체를 일일이 방문하시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것은 본사나 모기업(母企業)의 경영자가 의례적으로 시행하는 그런 단순한 ‘방문’이 아니었다. 거래업체의 경영 상태가 결국 기업의 경영 상태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철학을 실천에 옮기는 또 다른 ‘현장 경영’이었다.
1960년대 후반, 각종 부품개발이 한창이던 시절, 당시 정세영 사장님은 부품개발 협력업체를 선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신중에 신중을 기하셨다. 일단 어떤 중소기업이 협력업체 후보로 거론되면 정 사장님은 즉시 그 업체를 방문하여 먼저 현장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업체의 생산시설은 물론이고 사무실이나 창고에 이르기까지, 그 업체의 능력과 면모를 살피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 사장님은 업체의 대표를 면담하고 그들의 의지와 자질을 확인하였다. 지금이야 수많은 부품업체들이 다 견실한 중견기업들이지만, 당시에는 정말이지 산골 오두막의 부엌과 같은 수준의 현장들도 많았다. 그러나 정 사장님은 그 크고 작음에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수준이 백지 상태인 마당에 ‘중요한 것은 시설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 정 사장님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비록 시설은 낙후하더라도 사장의 인성(人性)과 자질이 양호하다면 협력업체로서의 자격은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협력업체로 선정이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정 사장님은 1년에 한두 차례 이상은 반드시 200여 개나 되는 협력업체를 찾아가서 생산 현황과 품질 관리 등을 다시 체크하였다. 초창기에는 돼지털을 가공하여 자동차 바닥 시트를 생산하던 시절도 있었다. 사장님과 함께 그 업체를 방문하면 돼지털 가루와 냄새 때문에 무척 괴로웠는데, 사장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현장 체크에 여념이 없었다.
정 사장님이 특히 강조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깨끗한 거래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부품개발, 자재관리, 품질관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현대자동차 창립 당시부터 철저하게 적용되어 온 원칙이었다. 우선 거래 관계상 협력업체 직원들과 식사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우리쪽에서 식사비를 내도록 하는 엄격한 관례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장님은 관련 예산이 있고 없음을 떠나, 또 금액의 크고 작음을 떠나 어떤 영수증도 다 결재를 해주셨다. 그러다보니 직원들은 오히려 설렁탕이나 자장면 수준으로 식사를 했고, 그런 검소함과 투명함이 현대자동차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협력업체와 거래를 맡고 있는 직원의 경우에는 그 업체에 청첩장을 보내지 못하도록 한 것도 그 같은 원칙의 하나였다.
정세영 사장님은 본사와 협력업체가 함께 발전하는 공영(共榮)의 길을 열어 가신 분이었다. 협력업체가 납품을 하면 납품 당일에 검수조서를 발행하도록 하였고, 납품 대금 역시 즉시 지급되도록 조치하였다. 울산 지역은 화요일에, 서울 지역은 목요일에 대금을 지급하는 원칙을 제도화하여 이를 반드시 지켜 주었고, 그 결과 부품업체들은 자금관리의 안정성과 유동성(流動性)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이 같이 각종 배려를 아끼지 않는 대신, 정 사장님은 협력업체에 투명한 거래와 엄격한 품질관리를 요구했다. 협력업체의 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만약 거래상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더 이상 거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대신 한국 자동차산업을 책임진 주역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 상태에서 출발한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밑거름에는 수많은 협력업체들의 도움이 있었고, 그처럼 협력업체와의 진정한 ‘협력’이 가능하게 만든 밑거름에는 바로 정세영 회장님이 계셨다.
나는 지금도 매주 월요일 간부회의 때마다 투명하고 정직한 거래 관계를 강조하시던 정 회장님의 그 또렷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아울러 협력업체 대표들과 만날 때 설렁탕이나 자장면으로 식사를 하시고 당신께서 계산을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그 정신이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발전의 초석(礎石)이 되었다고 확신하며, 그 분과 함께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회사를 살리고 그룹을 살린 남다른 위기관리 능력

자동차 판매를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지나던 1969년 하반기, 현대자동차는 심각한 자금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현금으로 수금되는 돈은 전체의 30%에 그쳤고, 나머지는 소비자가 은행 적금이나 상호부금에 가입하여 2~3회 불입을 한 후 은행측에서 대출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소비자가 자동차를 구입한 후 그 은행 불입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은행 대출이 중단되고 그에 따른 할부금 미수액이 무려 90%에 이르자 회사는 심각한 자금압박에 빠진 것은 물론 당장 부도를 맞을 위기에 처하였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세영 사장님은 전사적인 위기관리 정책을 수립하였다. 은행이나 보험회사의 책임 회피 정책에 말려들면 우리만 도산할 게 뻔했으므로, 우리 스스로 불량 채권을 회수하여 자금압박을 타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즉시 전사적인 불량채권 회수반이 구성되어 활동에 돌입하였다. 모든 중역을 전국 각 지역 회수 책임자로 임명하였고, 사내 법대(法大) 출신 직원 10여 명을 선발하여 법적 수속 및 집행팀을 구성하였으며, 본사와 공장, 영업소 각 부문에서 우수인력 100여 명을 연체회수반으로 차출하였다. 이어 신설된 할부관리부를 중심으로 강력한 채권 회수 작전에 돌입하였고, 그 결과 2년 이내에 거의 모든 불량채권이 회수되어 회사는 정상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회수 작전’을 진두지휘한 것이 바로 정 사장님이었다. 회사 경영을 비상경영 및 채권회수 체제로 전환하고 조직개편, 인력 차출 등 강력한 회수 방안을 직접 수립하였으며, 매일 회수 상황을 체크하는 한편 수시로 지방을 방문하여 현장 상황을 점검하였다.
당시 정세영 사장님의 의지에 따라 채권회수반은 “돈을 못 받으면 그 집 솥단지라도 떼 온다”는 정신으로 활동하였고, 그 결과 “현대자동차 돈은 절대 떼먹을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물론 지나치게 가혹한 고객관리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때 일부 소비자들은 ‘할부금은 제대로 갚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후 고객의 은행 대출 능력을 사전에 확인하는 등 여러 제도적인 장치를 수립하였고, 회사 자체 할부 제도를 마련하여 현재와 같은 할부금융사(현대캐피탈)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정세영 회장님은 당시 현대자동차만의 위기를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우리 회사가 잘못되면 다른 계열사에까지 그 피해가 확산되어 결국 현대 전체의 위기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다. 만약 그때 그 같은 정세영 사장님의 위기관리 능력이 없었다면 회사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까 아찔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오늘의 현대자동차도, 나아가 오늘날의 한국 자동차산업도 없었을 것이다.
가장 많이 외국 출장을 다닌 자동차기업 경영자

우리 차를 세계로 수출하기 시작하던 무렵에도 정세영 회장님의 열정과 섬세함이 항상 큰 힘이 되었다. 우리는 초기에는 중동 및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 등 후진국에 진출하고, 이후 2단계로 유럽과 캐나다 시장, 그리고 3단계로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에 진출한다는 수출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런 기본 전략 아래 수출시장 조사팀을 구성하여 활동에 들어갔는데, 이때 정 회장님이 직접 업무에 참여하여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하고 개선하는 적극성을 보여 주었다.
특히 해외 대리점을 선정할 때는 정 회장님이 반드시 직접 해당 국가를 방문하여 현지 경영자를 면담하고, 그들의 역량과 판매전략 등을 직접 확인하였다. 이제 그 시장이 해외로 확대되기는 했지만, 그 적극적이고 진지한 모습은 초창기에 국내 협력업체 대표들을 면담하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이밖에도 현지의 은퇴 경영자에게 자문을 구하는 등,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한 끝에 해외 시장에 진출하였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실패를 적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역시 책상에 앉아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정 회장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해외 출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아마도 전 세계 자동차회사의 최고경영자 중에서 정 회장님만큼 직접 해외 시장을 많이 누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침내 인도 현지 생산 계획이 수립된 후 우리는 정 회장님을 모시고 약 3주 동안 부지 물색에 나섰다. 델리와 뭄바이, 그리고 첸나이 등 3개 지역을 후보로 나눈 후 불편한 현지 차량을 빌려 탄 채 하루 200~300Km 이상을 이동하는 강행군이었다. 공업용수, 전기, 철도, 도로, 항공, 항만 등을 직접 체크하고, 주변 주거지까지 세밀하게 확인하는 과정이 매일 반복되었다. 어느 때는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그 뜨거운 햇빛 아래 몇 시간씩 험한 산길을 걸어가야만 했고, 마땅히 식사할 곳이 없어서 아예 점심을 굶고 다니는 일도 흔했다.
내가 본 당시의 정 회장님은 비단 한 사람의 경영자가 아니었다. 나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험한 산길을 묵묵히 오르는 개척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있는 한, 현대자동차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정세영 회장님은 가신 지 1년이 지났다. 그러나 1년이건 10년이건 그 이상의 시간이 흐르건, 자동차산업을 향한 그 분의 정신과 열정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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