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USEUM 가슴 깊이 되새기며
과단성 있고 깊이 있는 정도경영

“비록 산 정상(頂上)에는 서지 못해도, 바른 길을 택하여 산에 오른다면 그 자체는 올바른 산행(山行)이다.”
나는 정세영 회장님을 생각하면 항상 이 말씀이 떠오른다. 그리고 실제로 바른 길을 택하여 묵묵히 산에 오르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 산행은 바로 정 회장님이 한 평생을 걸어온 ‘정도경영(正道經營)’의 한 걸음 한 걸음이었다.
나는 현대자동차라는 한 직장에서 정세영 회장님을 36년간 모셨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들이 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고 기억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 기간 동안 한 분의 직장 상사로서는 물론, 한 고결한 인간으로서의 정 회장님께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국민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기 훨씬 전인 1970년대 초, 현대자동차는 당시 정세영 사장님의 지시에 따라 국내 최초로 사내(社內) 의료보험제도를 만들었다. 모든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였고, 그만큼 종업원 복지에 신경 쓸 여유를 갖지 못하던 당시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정 사장님의 생각은 단호했다.
“현대자동차 가족들만큼은 아플 때 병원에서 충분한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정 회장님의 마음은 회사 경영에만 그치지 않았다. 언젠가 회장실에 결재를 맡으러 들어갔더니, 계산기를 옆에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고 계셨다. 회장님은 쌀 1톤당 국제시세를 기준으로, 북한 동포들이 굶지 않으려면 얼마 정도의 지원이 필요한지를 꼼꼼히 따져 보고 계시는 중이었다.
그 같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 뒤에는 정 회장님의 소박함과 정직함이 있었다. 한 번은 점심을 드시고 나서 무언가 고민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오늘 친구들하고 좀 비싼 점심을 먹었는데, 아무래도 내 개인 비용으로 결재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내가 “무슨 말씀을 나누면서 점심을 드셨는데요?”라고 되묻자 회장님은 “그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하고 회사 이야기를 주로 했지 뭐.”라고 대답하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분명하게 말씀드렸다.
“그렇다면 업무상 지출이 가능한 경비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제야 회장님은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는 데 동의를 하셨다. 물론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런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그 분의 정도경영을 가능하게 한 밑거름이었던 것이다.
정 회장님은 정도경영과 함께 ‘깊이 있는 경영’을 하신 분이다. 그 한 예로, 현대자동차 초창기 어느 중역회의에서 당시 정세영 사장님이 자재담당 중역에게 협력업체의 국산화율에 대해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역은 평소 모회사(母會社)의 국산화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정 사장님은 협력회사의 국산화도 함께 촉진시키는 계획을 적극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때 그 정책이 밑거름이 되어, 현재 자동차산업이 어떤 다른 산업보다 외화가득률(外貨稼得率)이 높은 분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회장님은 때로 결단력 있고 과단성 있는 경영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세계 자동차시장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남다른 혜안(慧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 수출의 적자 문제로 모두가 고심을 하고 있던 1998년 말, 정 회장님은 출근과 동시에 본부장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10년 무상(無償) 보증수리’라는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셨다. 품질보증 기간을 10년으로 대폭 늘림으로써 미국 소비자의 신뢰를 얻고, 가격을 먼저 올린 후 품질경영에 최선을 다하면 비용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복안이었다. 당시 아무도 생각해 낼 수 없었던, 실로 과단성 있는 경영 철학이 아닐 수 없었다.

신념과 철학을 겸비한 진정한 경세가(經世家)

정세영 회장님은 이윤만 추구하는 단순한 ‘기업가(Businessman)’가 아니었다. 신념과 철학을 겸비한 ‘사업가(Entrepreneur)’였다.
또한 정 회장님은 세상사에 대한 토론과 담론(談論)을 즐겼으며, 일찍이 유학시절의 수학(修學)과 현대자동차의 세계경영을 통해 체험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 분이었다. 그 같은 신념과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와 국가를 부단히 걱정하며 그 발전 방향을 모색한 진정한 ‘경세가(經世家)’였다.
어렵고 힘든 결정을 해야 할 때 정 회장님이 최종적으로 가장 중시하는 것은 명분과 의리였다. 32년간 키워온 현대자동차는 정 회장님에게 실로 분신(分身)과 다름없었다. 그런 회사의 경영권을 미련 없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큰형님인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님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정 회장님은 당시 계동(桂洞) 사옥 8층 회장 집무실에 걸려있던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액자를 보시면서 마음을 다스리셨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그 말을 몸소 실천한 용기는 바로 명분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철학이었다.
비록 그렇게 현대자동차를 떠나셨지만, 정 회장님의 공적을 빼놓고 한국 자동차산업과 현대그룹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회장님은 본인의 업적에 대해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정 회장님은 처음 현대자동차를 떠나셨을 때는 이런저런 걱정도 많이 했지만, 이후 현대자동차의 경영성과에 대해서 매우 만족해 하셨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현대자동차도 현대건설이나 현대중공업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매우 어려웠을 거야. 내가 다한 게 아니고 그룹의 도움이 그만큼 많았던 거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에는 진정한 겸손이 담겨 있었다.
한 번은 우연찮게 현대자동차 퇴임 임원들이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매우 가슴 아파 하셨다.
“내가 현대자동차를 경영할 때 임원들한테 좀 더 대우를 잘 해 줬어야 하는데……”
그렇게 자괴감을 표현하시는 걸 보며, 오히려 내 자신이 몸 둘 바를 몰랐다. 정 회장님 자신이 평생을 검소하게 사신 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검소함 속에서도 꼭 써야할 돈, 즉 명분이 있는 지출에는 과감하셨다. 몸이 불편하여 사무실에 출근을 못하고 댁에 계실 때였던 2005년 4월 말,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개교(開校) 100주년 기념사업에 약속한 기부금을 조속히 납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로부터 불과 20여 일 후에 세상을 뜨시고 말았으니, 나는 다시 한 번 명분과 신뢰를 중시하는 그 분의 성품에 고개가 숙여졌다.
이제 세상에 계시지는 않지만 정세영 회장님은 여전히 나의 윗분이다. 따라서 36년의 인연은 36년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정 회장님이 걸어온 정도(正道)를 되새기며, 그 분이 묵묵히 바른 길을 택하여 산에 오르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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