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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속에서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간 ‘포니정’

내가 정세영 회장님을 처음 뵌 것은 1964년 정 상무님이었을 무렵이고 그 후 1965년 단양시멘트에서 다시 뵈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 후 정 회장님을 곁에서 본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또 배웠다.
정 회장님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세심하고 냉철한 평가와 비판을 하시는 정도경영(正道經營)의 표상(表象)이라고 할 수 있다. 정 회장님을 뵌 3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추억들이 있었고, 그 기억들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만의 특유(特有)하고 어려운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꿋꿋이 현대자동차를 세계 5대 자동차 생산회사로 발전시킨 일이야말로 영원히 역사에 남을 업적이다. 아울러 현대그룹 회장으로서 현대그룹을 한국 제일의 기업군(群)이자 세계 20대 기업의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은 정 회장님의 업적에 대하여 그 누구도 칭송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고단하고 힘겨운 시련과 극복의 여정(旅程)이었다.
정 회장님은 ‘포니(Pony) 정’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릴 만큼 자동차산업 발전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신 분이다. 정 회장님은 포드 자동차를 도입하여 울산에 조립 라인을 건립하고, 국내 최초로 자동차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이에 만족 하지 않고 국내 최초의 고유모델인 포니를 탄생시킴으로써 ‘포니정’이 되셨으며, 그 포니정에 의해 이 땅에 비로소 ‘마이 카(My Car)’ 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국산화 100% 달성에 이어 3만~4만 개에 달하는 부품 개발과 조립을 통한 성능 보장, 그리고 마침내 세계시장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까지는 수많은 역경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시 자동차 생산에 참여한 모든 임직원 및 생산직 사원들도 새로운 역사의 창조자였으며, 그 위업에 대한 역사의 포상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역경의 순간들 가운데 하나는 민주화 바람이 거셌던 1987년이었다. 당시 매년 60여 일 이상 계속되던 노동조합의 파업은 생산자나 수요자, 그리고 세계 시장의 딜러들 모두에게 큰 고통이었다. 그리고 울산 시민의 생활과 부품업계의 경영에까지 막대한 손실과 고통을 안겼다.
당시 현대그룹 사장단과 임원들이 울산으로 출장을 내려가 24시간 숙식을 함께 하며 회사의 조속한 정상화를 돕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 회의를 거듭하고 문제를 분석, 토론하며 대책을 마련하는 자리를 가졌으며, 현대자동차 임원과 몇몇 그룹사 사장들이 함께 참석하는 정책회의를 갖는 자리도 수시로 마련하였다. 그때 정 회장님의 세심한 분석과 질문을 바탕으로 우리는 다각적인 대처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입장을 고려하여 명분과 실리를 따져서 결론에 이르고 보면, 경영에 막대한 지장을 줄 수도 있는 난관에 봉착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하지만 정 회장님은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이 정도(正道)를 택하였고, 나는 그 과감한 모습과 당당한 의지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한 번은 느닷없이 직장폐쇄라는 강공책(强攻策)을 구사하여 청와대는 물론 전국이 들썩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경찰이 진입하고 노조원들의 극단적인 대립까지 벌어져 최악의 상황까지 도달하였는데 결국엔 최악의 선택으로 보였던 그 강공책이 최선의 결과를 만들었다.
이후 10여년이라는 세월 동안 매년 노사(勞使) 갈등이 유행병처럼 번졌고, 이른바 ‘춘투(春鬪)’로 시작되어 7월 말경 하계 휴가에 가서야 끝이 나는 기나긴 갈등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진통 후에는 다시 생산의 열기가 가득 차서, 매분 당 새로운 자동차가 생산되어 굴러 나오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그러나 정 회장님은 그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도 누구보다 큰마음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계셨다. “경제보다 정치가 우선한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치 못할 홍역과도 같은 현상”이라는 것이 정 회장님의 철학이었다. 아울러 정 회장님은 우리 사회가 조속히 성숙해야 한다며, 10년 후, 20년 후의 우리나라와 자동차산업의 발전상을 그려보고 계셨다.

불의(不義)에 맞서면서도 누구보다 다정다감했던 그리운 모습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사실 기억을 되살려 보기도 싫은 일이지만, 1993년에 현대그룹은 창업 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바로 정주영(鄭周永) 회장님의 대통령 선거 때였다. 그룹의 총수가 선거전에 뛰어든 만큼, 당시 현대그룹의 임직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직간접적으로 선거에 간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거전이 시작되자마자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쳤다. 임직원들의 활동이 제한 되기도 하고, 일부 계열사에서는 임직원이 체포되어 구속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다보니 본격적인 선거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완전히 수족이 묶인 채 꼼짝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때 정세영 회장님은 계동(桂洞) 사옥 광장에서 현대그룹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결연한 외침으로 불법 탄압에 항거하였다. 그 와중에 정주영 회장님께서 창당(創黨)한 국민당(國民黨) 당사(黨舍) 안팎에서 “현대그룹이 곧 문을 닫는다”는 폭탄성 발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당시 당사와 현대그룹을 오가며 여러 상황에 대처하고 있던 나는 실로 난감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물며 당시 그룹을 이끌고 있던 정세영 회장님은 그룹 사활(死活)에 직면한 그 순간 얼마나 어렵고 괴로웠을 것인가. 아마 그 누구도 상상 할 수 없는 정도였을 것이고, 그만큼 매 순간을 이겨낸 정 회장님의 꿋꿋함에 지금도 고개가 숙여진다.
정 회장님은 그 절박한 상황 하에서도 결코 나약함을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앞으로 전진하였다. 나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최후까지 맞서서 그 난관을 헤쳐 나아가야 한다는 결심을 하신 정 회장님의 불굴의 의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 의지를 선거 관계자들에게 전하였고, 그 결과 그 의지는 또 다른 의지로 이어졌다.
당시 숨 막히는 선거전은 마치 총칼에 맞서는 형상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정 회장님의 굳은 의지와 결심이 후일 기업 경영에 어떤 영향으로 되돌아 올 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당당히 뜻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기에, 그것은 결코 잘못된 결정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선거 결과는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우리 모두는 큰 좌절과 허탈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고통과 후유증이 상당 시간 지속되며 그룹 발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정 회장님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지만은 않았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조속한 수습과 재기에 몰두하시며 그룹을 진두지휘하셨다. 현대그룹의 역사상 가장 큰 상처와 고통을 겪어야 했던 시기였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는 자리에 바로 정 회장님이 계셨던 것이다.
이후 정 회장님은 수많은 시련을 딛고 그 긴 세월을 오로지 회사 발전과 국가 산업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 쏟으셨다. 불철주야(不撤晝夜) 국내외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셨으며 해외 투자와 사세(社勢) 확장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 어려운 일을 수행하시면시도 정 회장님은 새로운 선택과 현세(現世)를 슬기롭게 타협하면서 쓰라렸던 과거를 떨쳐버리셨다. 그리고 나날이 과감한 시도를 하며 밝은 희망과 건강한 생활로 삶을 영위하셨다.
하지만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건강을 잃게 되셨고, 끝내 세상을 하직하시고 말았다. 우리 모두에게는 한없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기고 영원히 잠드신 것이다.
정 회장님이 저 세상으로 가신 일을 보면, 인간의 힘과 노력보다 환경 변화에 대처하는 그의 정성도 때로는 부득이한 선택에 굴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운명에 다시 한 번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돌이켜보면 글자 하나와 토씨 하나를 그대로 넘기지 않으시던 섬세함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때로 매정하리만치 맺고 끊음이 확실하며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던 과감성과 추진력은 “역시나!”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정 회장님은 참으로 검소한 분이셨다. 회장님과 가까운 측근들은 ‘구두쇠 포니정’이라는 별명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정주영 명예회장님으로부터 이어진 집안의 가풍(家風)이기도 했다. 회사 사장단이나 임원들과의 비공식 모임이 별로 없었다는 것도 그 분의 검소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되며, 애당초 술과 담배를 안 하시는 것도 몸에 밴 검소함 때문이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도저히 낭비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도 그 분의 눈에는 ‘하지 않아도 될 낭비’라고 여겨졌을 만큼 겸손과 검소함이 몸과 마음속에 깊이 배어 있었다.
그 같은 검소함 속에 정 회장님은 그 다정다감한 성품이 마치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봄볕처럼 따뜻했으며 때로는 맑은 동심(童心)을 지닌 소녀와도 같이 자상한 분이셨다.
그런 정 회장님이 이제 우리 곁에 계시지 않으니, 그저 멍하니 하늘만을 우러러 보게 된다.

정세영 회장님! 이제 가신 지 1년, 저 세상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부디 영면(永眠)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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