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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의형제(義兄弟)의 인연

나는 감히 정세영 회장님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그 분과 내가 과거에 맺은 의형제(義兄弟)의 연(緣)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50여 년이 지난 1957년, 미국 유학의 길에서 돌아온 정세영 형님은 당초 가슴에 품었던 학자의 꿈을 접고 현대건설에 입사하였다. 당시 상공부(商工部, 현 산업자원부)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무역업자 등록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러 온 정세영이라는 사람과 처음으로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미소 짓는 풍의(風儀)에서 남다른 정감을 느꼈으며,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자 하는 도전 정신과 열의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돕고 싶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급적 빨리 허가를 내주는 일이었다. 나는 보통 1개월이나 소요되는 허가서 발급 기간을 대폭 단축시켜 단 사흘만에 허가서를 발급해 주었다.
그때 그는 “당신 같은 공무원은 처음 보았다”고 하면서 나를 현대건설(現代建設) 옥상 구내식당으로 불러 점심을 대접해 주었다. 그것이 구내식당의 소탈한 점심이고 또 진심에서 우러나온 초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함께 식사를 나누었고, 짧은 시간에 그의 남다른 성품과 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먼저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제안했고, 우리 두 사람은 마침내 의형제의 연을 맺게 되었다.
나는 의형제를 맺던 그 날 형님께서 나에게 당부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동생은 부디 남을 도와주는 공무원이 되어 주시오.”
그 당부는 내 공무원 생활의 또 다른 척도가 되었으며, 나는 항상 봉사하는 공무원이 되고자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이후 형님은 한국 자동차산업의 역사를 새로 쓰는 크나큰 업적을 이루어 갔고, 모든 기업인의 귀감이 되는 정도경영(正道經營)을 실천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내가 처음 만난 형님에게 단 사흘만에 허가서를 발급해 준 일이 그릇된 판단이 아니었음을 느끼고 항상 마음 뿌듯하였다.
의형제의 인연을 맺은 후 나는 형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 특히 형님 곁에 다섯 사람의 자문역(諮問役)이 있어, 물질적 도움보다는 의리와 우정의 마음으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나누는 값진 인연이 있었다. 1961년에 형님을 좌상(座上)으로 연을 맺은 육총사(六銃士)는, 그 의리와 우정의 힘과 가치를 잊지 말자고 약속했었다.
이제 유명(幽命)을 달리하신 형님을 빼고 이제 허전한 오총사(五銃士)가 된 우리는, 지금도 가끔씩 모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형님과의 값진 추억과 인연을 회고한다. 모두 칠순(七旬) 고개를 넘은 나이지만, 그 소중한 추억을 되새길 때만큼은 과거 청장년(靑壯年) 시절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과거 우리 중 세 사람이 장관직(법무장관)으로, 다른 한 사람이 법제처장으로 승진했을 때 형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모른다. 그 진심어린 축하와 격려 덕분에 우리는 업무의 고단함도 잊고 각자 맡은 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1967년 현대가 자동차산업에 진출하면서 형님이 사장으로 추대 되던 날, 우리는 종로(鐘路) 종각(鐘閣) 뒤의 주점으로 형님을 초청하였다. 그리고 함께 조촐한 축하연(祝賀宴)을 나누며, 우리는 형님에게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그것은 현대자동차 정세영 사장에게 보내는 응원의 박수였고, 나아가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의 미래에 보내는 기대에 찬 환호였다.
그리고 그 기대는 역시 헛되지 않았다. 형님께서 경영일선에 나서면서 “독자적 기술개발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며 국산차 개발을 시도했을 때, 주변의 분위기는 한결같이 냉소적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하루는 형님이 나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동생, 외국 부품을 들여다 단순하게 조립 자동차를 생산해서 판매하면 아무래도 미래가 없을 거 같은데 말이야. 그러니 적극적인 기술 도입으로 국산차를 개발하면 어떨까?”
나는 그 질문에 주저 없이 동의했다. 나아가 내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국산차 개발의 당위성에 관해 역설했다. 당시 나는 상공부 전기공업과장으로 봉직하면서 독자적으로 냉장고, 세탁기, TV, 수상기, 반도체 등의 국산화를 추진 중에 있었기에, 자동차의 국산화에 대한 필요성에도 적극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형님은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그렇지?”라고 하면서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는 그 힘 있는 형님의 손에서 한국 자동차산업의 밝은 미래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님의 손에 의해 마침내 그 미래가 시작되었다. 자동차 국산 개발을 위하여 본격적으로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를 이태리에 보내 기술을 독려하였고, 마침내 국내 최초의 고유모델인 ‘포니’를 개발하였다. 또 세계시장 공략에 도전하여 1974년 이태리 토리노자동차 박람회에 출품하고 난 후,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던 형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 가슴에 품은 사진 한 장, 내 가슴에 영원히 새긴 형님의 온정

형님은 개인적으로도 나에게는 큰 은인이었다. 예순 이후의 내 생활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 조그마한 프레스 가공 공장을 설립하도록 주선해 준 것은 나에게는 잊지 못할 은혜였다. 나는 그 일을 통해 물질적인 안정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소중한 것 ─ 바로 인간적인 정과 의리를 통해 내 정신적인 풍요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공장을 설립하며 나는 ‘주식회사 세호(世湖)’라는 상호를 지었다. 형님 함자의 ‘세(世)’자와 나의 아호(雅號) 가운데 ‘호(湖)’자를 합친 것으로써, 형님의 은혜와 뜻을 잊지 않겠다는 내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내가 회사를 설립한 후 언젠가 상공부장관이 업무협의차 울산산업단지와 현대자동차회사를 방문하기 위해 울산에 왔을 때였다. 장관의 첫 일정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데다 프레스 여섯 대가 전부인 한 영세공장이었다. 그때 대동(大同)했던 기업인들의 놀라는 표정과, 형님의 빙그레 웃으시는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그것은 결코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일이 아니었다. 그 규모가 크던 작던, 모든 부품 협력업체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철학을 직접 보여준 것이었다. 나는 그 같은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현대자동차, 그리고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이 있을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정주영(鄭周永) 회장님께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그때 형님의 고통과 번민은 컸다.
나는 여러 가지 상심에 빠진 형님에게,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입장을 밝히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독대를 하고 나온 형님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 날 이후 나는 형님과 여러 차례 식사 자리를 가지며 형님의 어려움과 고뇌에 찬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내 의견을 말씀 드렸다.
그리고 결국 형님은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여 32년간이란 긴 세월 경영자로서 외길을 걸어오면서 많은 시련과 난관을 극복한 저력이 바로 형님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저력은 바로 형님의 인간미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분을 형님으로 모시며 그 인간미를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큰 행운인가.
오랜 세월 형님의 사랑을 받다가 고향인 경북(慶北) 상주(尙州)로 낙향하여 각종 문화사업을 통해 지역에 봉사하며 소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동안 건강하시던 형님이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하였다는 급보(急報)를 접한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그 즉시 병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병자인 형님이 오히려 나의 아픈 심정을 이해하시고 어루만져 주었다. 다행히 수술 결과가 좋아서 미국 치료를 받고 난 후에는 다시 식사 자리를 가질 수 있는 기쁨을 누렸고, 나는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빌었는지 모른다.
나는 추석 명절 때면 내가 직접 과수 농사를 짓는 상주 특산 배(梨)를 보내 드리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 형님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 보내준 배는 잘 나누어 먹었는데, 농사지어서 나 다 주는 것 아니냐? 앞으로 보내려면 조금만 보내.”
평소 소탈하고 검소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 다음 해부터 평소의 절반 이하로 그 수를 줄였다.
2003년 10월에는 내가 심장질환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때 나는 형님이 보내준 다정다감한 서신의 내용을 단 한 글자도 잊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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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형
그동안 고생 많았던 것 모르고 지냈습니다. 하기야 내가 아프니, 알아 봤댔자 별 수는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사모님 무고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보내주신 배는 이웃과 함께 잘 나누어 먹었습니다.
전화로 말씀드린 심장을 튼튼하게 한다는 약은 미국에서 의사들이 많이 먹는답니다. 하루에 한 알씩 들라고 했습니다. 비타민 E는 아시다시피 노화방지약입니다. 먹어두어서 손해는 안날 것입니다. 이것도 하루에 한 알씩입니다. 사모님과 함께 드셔도 좋습니다.
그럼 항상 건강하기 빌며 이만 졸필을 마칩니다. 내내 건강하기를 빌며…….
서울의 친구 세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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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신의 첫 머리에서 형님은 나를 ‘형’이라는 호칭으로 불러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편지의 친필 한 자 한 자에는 진정으로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따라서 나는 형님이 보내준 약을 먹지 않아도 이미 그 약의 효능을 몸으로 마음으로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내가 모스크바 문화탐방을 가 있는 동안 그 자상하던 형님이 영면(永眠)하였다는 비보(悲報)를 접하였으니, 그 비통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귀국을 서둘러 겨우 삼우제(三虞祭) 날 형님이 잠든 묘소를 찾았으나 형님의 자태는 이미 볼 수 없었다. 흐르는 애통의 눈물이 앞을 가리는 가운데, 지난 날 형님의 은택(恩澤)이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고백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나 또한 두 번이나 수술을 받고 시골에 칩거하면서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 한 장(章)이 바로 <국산자동차 ‘포니’의 대부(代父) 형님과 나 사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으며, 형님과 나 둘만이 아는 이면사(裏面史)가 그 내용에 담겨져 있다. 그러던 중 이 1주기 추모집에 형님을 그리워하는 글을 싣게 되니, 새삼 떠오르는 지난날의 감회와 그리움에 눈시울을 적시게 된다.
나는 회고록을 통해 다시 한 번 형님의 크나큰 업적을 되새겨 보았다. 지난 날 자동차회사를 창립하여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고, 이후 이소적대(以小積大)하여 유형, 무형의 수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 바로 형님이었다. 그 같은 업적을 통해 국가 사회에 크게 공헌하고 인류의 삶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였으니, 그 공적이 얼마이며 그 치적이 또한 얼마인가?
나는 형님의 성취욕과 개발의지에 탄복하고, 남다른 기업윤리와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후덕(厚德)을 존경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도 모르게 형님의 하시는 일에 동조(同調)하고 동화(同化)하여 지난 반생(半生)을 함께 지냈다.
그러나 이제 만사가 끝나 영면하는 형님에게 무슨 말이 통하겠는가. 하지만 형님이 남긴 수많은 공적은 국가사회의 번영에 기반이 되고 인간생활에 필수(必須)가 되어 영원히 존재 할 것이다. 아울러 그 온정과 은덕을 잊지 못하는 후세인(後世人)들이 형님의 공적을 구비(口碑)로 전하여 길이 귀감이 되게 할 것이다.
원래 호형호제(呼兄呼弟)란 인격과 덕망을 갖춘 후덕한 분을 나이와 관계없이 호칭하기 때문에 나에게 영원한 형님은 한 분밖에 없다. 후사자(後死者) 만희가 형님 옆에 가면, 과거 그 따뜻한 서신에서처럼 형님이 나를 다시 형이라고 불러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1998년 고향으로 낙향하면서 형님이 그리워 늘 형님 가족 사진을 지니고 있다. 지금 다시 그 사진을 꺼내어 들며, 삼가 형님의 명목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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