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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자동차 설계 인생을 통틀어 가장 능력 있는 고객

지난 2005년 9월, 나는 디자이너로 일을 하기 시작한 지 50년이 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고(故) 정세영 회장만큼 능력 있고 결연한 의지를 가진 분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그동안 세계 유수의 여러 기업 경영자들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조국의 경제와 미래에 깊은 영향을 미친 자동차산업의 ‘선구자’와 그토록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내가 정세영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71년 도쿄 모터쇼에서였다.
당시 나는 카로체리아 베르토네(Carrozzeria Bertone)의 스타일링 센터(Styling Centre)에서 일하면서 마쯔다(Mazda) 프로젝트(Mazda Luce 1000/1500)의 책임자로 선임되었기에, 이미 일본 자동차산업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 후 나는 기아(Ghia)로 자리를 옮겨 스타일링 디자인 센터(Styling and Design Centre)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Isuzu 117 쿠페를 디자인하였다. 그 차종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놀랄 만큼 빠르게 발전하는 일본의 경쟁시장에서 이례적으로 살아남아 15년간 양산(量産)되었다. 이후 나는 나의 기술 파트너였던 알도 만토바니(Aldo Mantovani)와 함께 1968년 이탈디자인(Italdesign)사(社)를 설립하였고, 그 첫 프로젝트 중 하나가 스즈끼 micro city-car였다.
1959년부터 이렇게 지속적으로 이어진 일본과의 업무상 인연 속에 1971년 내가 도쿄 모터쇼를 방문하고 있을 때였다. 현대자동차 정세영 회장이 측근을 통해 나를 만나자고 초청했다.
당시 정 회장이 나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 회사들과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다양한 모터쇼에 전시되었던 내 드림 카(Dream car)에 표출된 독창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시 이탈디자인이 세단 승용차와 알파 로메오(Alfa Romeo)의 새로운 트레이드마크인 알파수드(Alfasud)를 개발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였거나, 이탈리아 남부에 세워질 생산 공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유는 어디에 있든지, 나는 당시 일본 시장 관계자였던 미야카와와 동행하여 정 회장을 만났다.
정세영 회장은 나와 이탈디자인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 우리가 고안해 낸 업무절차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업무절차는 독창성과 기술, 방법론과 실질 생산, 견본 생산과 몰드 및 장비 고안 등, 디자인 및 양산 과정과 관련된 모든 범위의 고객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나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정세영 회장이 매우 현명하고 결의가 굳은 사람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정 회장은 자신이 속한 현대라는 회사와 자신의 직함에 대해 소개하고, 현재 최초의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 자동차산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나를 한국으로 초청했고, 나는 그 다음 주에 서울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서울에 도착하자 정 회장은 나를 현대자동차 생산공장으로 데려가 포드의 코티나(Cortina) 조립 라인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나는 솔직히 다소 회의적이었다. 그때 당시 피아트(FIAT)는 유럽 소형차와 중형차 시장의 리더였고, 나는 생산공정 전 과정에 걸쳐 유럽 모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을 때였다. 사실 당시 일본도 유럽 자동차 제조업체들의 기준에 맞추는 데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보다 여러 면에서 뒤떨어진 한국의 자동차산업의 경우 독자모델 생산은 여전히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었고, 또 가능하리란 긍정적인 신호도 아직 보이지 않았다.
정세영 회장은 내가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나를 거대한 포스터가 벽을 덮고 있는 한 빌딩으로 데려갔다. 그 포스터에는 거대한 조선소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단계별로 보여주고 있었다.
“보세요, 주지아로씨, 2년 전 저기는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던 해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곳에서 우리는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선박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정 회장과 나는 함께 소리를 내어 웃었고, 그의 웃음에는 솔직담백함과 생동감이 넘쳤다. 우리는 굳은 악수를 했으며,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우리가 한국 자동차산업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토리노의 신화(神話)에서 세계의 신화로- 꿈을 현실로 바꾼 나의 친구

정세영 회장은 인내력과 더불어 아주 뛰어난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보통 자동차산업 개척자들은 이른바 ‘시리즈 자동차’를 만들기 전에 먼저 틈새시장을 찾는다던지, 아니면 부유층 고객들을 위한 고품격 세단 승용차나 스포츠카를 만드는 것으로 자동차 시장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정세영 회장은 한국 시장이 이미 보다 넓은 중형차 시장에 진입할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다.
정세영 회장은 Britishi Leyland의 전임 이사였던 턴불(George Turnbull)을 초빙하여 고문으로 위촉했고, 턴불의 기술팀이 함께 내한하여 기술 자문을 맡았다. 이탈디자인은 공장 내 성능시험과 도로주행 성능시험을 위한 시제품(試製品) 개발 및 제조, 스타일링 리서치와 디자인 업무를 위임 받았다. 각종 부품에 대한 실험은 대부분 이탈리아 토리노의 현지 시설 및 기술팀과 연계하여 이탈리아에서 진행되었다.
한편 정세영 회장은 최초의 프로젝트가 향후 또 다른 프로젝트와 제조 공정으로 연계되도록 하기 위해 이탈디자인과 중요한 합의를 했다. 그것은 50명의 젊은 한국 엔지니어를 토리노에 파견하여 이탈리아 동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과정에서 현대만의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단계적으로 배워나가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자동차 설계에 들어갔지만, 당초 생산할 수 있는 신차의 범위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미쓰비시의 축거와 기계장치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엄격한 경제 표준에 걸맞게 향후 산업화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해야만 했다.
당시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지속적인 확장세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혁신적인 것엔 아직 익숙하지 못할 정도로 미성숙한 수준인 것도 사실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 같은 시장 여건에 맞는 제품 라인을 제안했다.
약 4년 동안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정 회장과 나는 이탈리아와 서울을 오가며 정기적으로 만났고, 그런 사이에 우리는 사업 관계를 넘어 이미 친밀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정 회장이 토리노에 있을 때는 영광스럽게도 우리 집에서 머물렀고, ‘Count Piulet’이라는 레스토랑에 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지금 불행히도 그 레스토랑은 문을 닫고 없지만, 그곳에 가서 자리에 앉으면 이탈리아어로 “소금은 적게!”라고 말하곤 하던 정 회장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정 회장은 유럽에서 모터쇼가 열릴 때마다 어김없이 나를 불렀다. 또 우리는 유럽의 자동차 제조업체를 함께 방문하곤 했다. 정 회장은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미 유럽과 미국으로 직접 수출하기로 결심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유럽의 디자인과 기술 정보에 정통하길 원했다. 정 회장은 특히 내가 197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전시했던 Audi Karmann의 시제품인 ‘Ace of Spades’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세계 무대에 신차를 처음 선보일 기회를 1974년 가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로 잡았다. 정세영 회장은 그 자동차를 ‘포니(Pony)’로 부르기로 결정했는데, 그는 ‘생기 있고 힘 있는 말’, ‘훌륭한 사육(飼育)을 받아 튼튼하고 믿음직한 망아지’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 날이 왔고, 이탈디자인의 사업장과 본사에서는 수많은 이벤트가 열렸다. 눈부신 전통 한복을 입은 로마 주재 한국 대사와 아름다운 한국 모델들이 이벤트에 참여했다.
우리는 포니와 함께 유선형 스포츠 2+2 쿠페를 선보이기로 결정했다. 유선형 스포츠 쿠페는 포니의 축거를 바탕으로 스타일링 리서치를 실시하여 만든 우아한 볼륨의 자동차였다. 전면부는 뾰족하고 날카로웠고, 날렵하게 올라간 트렁크 부분은 기다란 후면등을 갖추었다. 또 범퍼와 헤드라이트는 자동차 몸체에 걸맞게 혁신적인 메탈그레이로 도색되었고, 내부 계기판은 조각처럼 디자인되었으며, 실린더 패널은 반사방지 처리가 되어있었다. 현대자동차의 이미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정세영 회장은 이 모델에 ‘현대 포니 쿠페’라는 이름을 붙였다.
토리노 모터쇼에서 현대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새로운 한국 자동차 제조업체의 원대한 목표를 소개하고, 장차 세계 시장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토리노에서 첫 선을 보인 이듬해, 포니는 한국에서 본격 생산 판매되기 시작했다. 자동차 시판 초기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몇몇 차가 우중충한 모래 빛깔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내가 정세영 회장에게 왜 그런 색깔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묻자 그는 “그 자동차들은 택시 기사들을 겨냥한 것인데, 앞으로 크게 성공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포니로 시작된 정 회장과의 인연은 이후에도 오래 지속되었다. 1982년에는 해치백 형태의 포니 변형 모델을 만들어 시판하였고, 이듬해인 1983년에는 스텔라를, 1985년에는 포니의 새 중형모델인 엑셀과 세단 승용차인 프레스토를, 그리고 1988년에는 뉴소나타를 각각 시판하였다. 이들 새로운 모델들은 울산의 거대한 신(新) 공장에서 생산되었는데, 울산 공장의 생산능력은 소형차 기준 연간 30만대에 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한국 자동차산업은 새로운 도약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나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정세영 회장의 꿈이 그의 열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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