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USEUM 가슴 깊이 되새기며
인생이라는 긴 길을 함께 걸었던 소중한 친구

우리 인생에서 친구라는 존재가 없다면 어떨까. 세상은 삭막하기 그지없고, 삶은 외롭기 한이 없을 것이다. 친구 없는 우리 인생을 생각할 수 없듯이, 나는 정세영 회장이 없는 내 인생을 생각할 수 없다.
정 회장과의 인연은 이미 대학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정 회장은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정치외교학과를, 나는 같은 대학 상과(商科)를 다닌 동기생으로서, 우리는 안암(安岩)의 석탑(石塔) 캠퍼스 아래서 함께 푸른 청춘을 보냈다.
그 소중한 인연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우리는 6개월 동안 뉴욕에 머물며 함께 MBA(경영학 석사과정) 입학 준비를 하였고, 낯선 이국(異國)에서의 가난한 유학 생활을 이겨내는 데 서로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마음으로부터 마음으로 전해지는 진정한 도움이었고,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커져갔다.
비록 각자 다른 대학으로 진학을 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방학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 다른 한인(韓人) 유학생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며 친구로서의 정을 나누었다. 만약 나에게 정 회장이 없었다면, 그리고 정 회장에게 내가 없었다면, 우리는 훨씬 고단하고 외로운 유학 생활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나는 한일은행(韓一銀行) 비서실에 입행(入行)하여 사회 생활을 시작하였고, 정 회장은 현대건설(現代建設)에서 경영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한일은행은 현대와의 거래가 많았고, 그 때문에 정주영(鄭周永) 회장님이 자주 은행에 들리곤 하셨다. 어느 날 나는 정주영 회장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제가 세영이와 학교 동기이고 친구입니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님은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으셨다. 그 이후 은행을 출입하는 정주영 회장님의 발걸음도 왠지 예전보다 더 가벼워지신 것 같았고, 나 또한 ‘세영이의 형님’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최선을 다해 모셔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이후 정세영 회장이 현대자동차 사장이 되어 경영을 책임지게 되었을 때 이제는 정 회장이 우리 은행을 수시로 드나들며 회사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현대자동차는 경영상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에서 발행하는 어음은 사채시장에서 할인조차 되지 않았고, 심지어 언제 부도(不渡)가 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는 내 친구 정세영 회장을 보았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하나둘 극복한 정 회장은 마침내 독자적인 고유모델 생산이라는 일생일대의 모험에 도전했다. 당시 자동차 공업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열악한 기술 수준에서, 2~3만 개의 부품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자동차 생산에 도전하는 일은 참으로 무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 아니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 냈고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역사를 바꾸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정 회장이 겪은 정신적인 고통을 수도 없이 지켜보았다. 친구로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분명 한계가 있었고, 정 회장은 그 어려움을 묵묵히 이겨낸 참으로 대견한 친구였다.

항상 고민하던 앞서가는 경영자

정세영 회장이 현대그룹 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정 회장은 특유의 섬세함과 인간적인 면 때문에 그룹 전체를 포용하는 경영을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당시 호남정유(湖南精油)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한 번은 정 회장이 나에게 회사의 인사규정과 급여규정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룹의 관련 규정을 재정비하는 데 참고로 삼겠다는 얘기였는데, 사실 그 부탁은 참으로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대기업들이 인사나 급여와 관련된 사항을 극히 예민하게 생각하며 철저한 대외비(對外秘)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마다 근로 조건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노사(勞使) 협상 과정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흔쾌히 승낙을 했고, 정 회장은 매우 놀라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 같은 규정을 대외비로 여기는 업계의 관행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참고가 되면 그것이 공동 발전의 토대가 될 것이고, 따라서 오히려 노사 문제를 원활하게 풀어가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다음 날 내 방을 찾아온 현대그룹 인사전무와 비서실장에게 나는 약속대로 모든 자료를 복사해 주었다. 이후 정 회장은 큰 도움을 받았다며 거듭 감사의 말을 했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금 당장 호남정유 수준으로 급여를 줄 수는 없지만 언젠가 현대자동차만이라도 그 수준이 되도록 노력할거야!”
당시 내가 재직하고 있던 호남정유는 국내 최고의 급여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 회장은 자신이 평생을 일구어온 현대자동차에 대한 애정과 그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그런 의지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항상 앞서 가려고 노력하고 또 구성원을 배려하는 경영자였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늘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경영 인생을 살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사무실을 바라보며,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이름을 가슴에 새기며

정 회장과 나는 성북동(城北洞) 성낙원(城樂園) 근처 같은 동네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다. 생일이나 명절이면 온 가족이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그럴 때면 우리는 영락없이 ‘형제와 같은 친구’였다.
마침 정 회장과 나는 나이가 동갑(同甲)인 데다 생일도 한 달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형이라고 우기는 일도 많았는데, 정 회장은 우리 집사람 안부를 물을 때면 꼭 “제수씨 잘 있나?”라며 형 노릇을 하려고 했다.
나는 정 회장의 뒤를 이어 고려대학교 교우회장(校友會長)을 맡았다. 당초 선임자였던 정 회장이 자신의 뒤를 이어 그 중책을 맡아줄 것을 수차례 권하였지만 나는 회사 일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끝내 고사를 했었다.
그러다 정 회장의 임기 마지막에 가서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교우회장 일을 맡게 되었는데, 정 회장이 임기 중에 이룬 업적이 너무나 많아서 나는 상대적으로 그 업적을 키워가는 일만 맡으면 되었다. 고려대학교를 함께 다니면서 만난 친구끼리 후일 사회에 나와 모교를 위한 일을 연임(連任)하게 되었으니, 그 또한 정 회장과의 소중한 인연이라 생각된다.
정세영 회장은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겉으로는 농담도 잘하는 유(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 어느 누구보다 강(剛)한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성품이었다. 그런 성품이 있었기에,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자동차산업의 새로운 역사를 쓴 것이었다.
한편으로 정 회장은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친구였고, 그 때문에 훨씬 오래 건강을 유지할 줄 알았다. 그렇게 빨리 갈 줄 짐작도 못하고 있었기에, 남은 친구로서 내 가슴은 항상 메어지는 듯하다.
지금 내 사무실이 있는 무역센터 ASEM 타워는 정세영 회장의 사무실이 있던 현대산업개발과 바로 마주 서 있다. 21층 사무실 창가에 설 때마다 나는 한참 동안 맞은 편 건물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그리운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이름을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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