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USEUM 가슴 깊이 되새기며
불행했던 전시(戰時)의 대학 생활, 그러나 그 속에 빛나던 이름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다더니 정세영 회장이 극락(極樂) 세계로 가신 지가 어언 1년이 지났다. 지금도 나는 생전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고, 그립고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그 정을 참을 길이 없다. 무엇이 그리도 급하여 총총 가신 것인지, 안타깝고도 한스러운 마음 간절하다.
평소 겸손한 몸가짐과 분별 있는 사고를 가지고, 매사에 성실하고 합리적이었던 정 회장은 정녕 우리 시대의 지성인이요 모범적인 기업인이었다. 아직도 수십 년은 더 활동할 수 있는 건강이었는데, 이제는 불러도 대답 없는 정 회장을 그리워하며, 그 고결했던 인품을 어느 세상에서 다시 접할 지 그저 슬프기만 하다.
정 회장과 나는 1948년도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동문(同門) 동기(同期)로 만났다. 이후 50년 동안 그 인연을 이어가며, 한 평생을 친구가 되어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나누었다. 그 소중한 인연을 생각하면,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인생을 살아왔구나 싶은 마음에 늘 만족스럽고 자랑스럽고 행복하기만 했다.
나는 당초 상과(商科)에 입학하였다가 2학년 진학 때 정치과(政治科)로 전과(轉科)를 하면서 정 회장과 같은 학과 클라스메이트가 되었다. 그러나 진학의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우리의 대학 생활은 기약 없이 중단되었고, 생사(生死)를 알 수 없는 피란길에 오르는 참담한 인생이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연배(年輩)는 학교 복(福)이 무던히도 없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 때는 일본의 만주(滿洲) 침략전쟁에 이어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면서 소년기의 학교 생활도 여지없이 혼란으로 얼룩졌다. 중학교 때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에 따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 되고, 대신 전쟁지원 근로봉사로 낭만과 희망의 청년시절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이 같이 참으로 불행한 학교 생활이 이어지다가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이번에는 좌우(左右) 사상 투쟁과 같은 국내 사정으로 극도의 불안한 시국을 겪었다. 그리고 급기야 닥친 최후의 비극이 우리가 대학 2학년 때였던 한국전쟁이었으니, 우리의 학교 시절은 갈기갈기 찢긴 불행의 기록이었다.
그런 중에도 우리 정치과는 정세영 형을 회장으로 선임하고 내가 부회장을 맡아, 1년 선배들이 주최한 바 있던 <아남민국(亞南民國) 모의국회(模擬國會)>를 계승하여 속개(續開)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막 준비에 착수하는 단계에서 전쟁이 발발하여 기약 없이 흩어지고 말았으니, 이 어찌 가슴 아픈 대학 시절이라 아니하겠는가.
우리 고대(高大)는 대구(大邱) 원대동(院垈洞)에 임시교사(臨時校舍)를 마련하여 강의를 열었지만, 말이 개강(開講)이지 교수님도 군에 동원되고 학생이라야 고작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군입대자나, 부산(釜山) 등 각지에서 형편이 닿는 대로 강의를 받으러 오는 전시(戰時)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우리는 꿈을 접지 않았다. 정세영 형이 준비위원장으로 총지휘 감독을 하고 내가 부위원장으로 섭외(涉外)를 맡아 모의국회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임시수도인 부산에 주재하면서 선배들을 찾아뵙고 협찬과 후원을 간절히 부탁하면서 그 진행 경과를 정세영 형에게 보고하던 일이 생생히 기억난다. 고생도 많았지만, 그런 가운데도 즐거움 또한 적지 않았다.
그때 가장 감명 깊었던 일이 하나 있다. 정주영(鄭周永) 큰형님을 찾아뵙고 취지를 말씀드렸더니 “열심히 활동하고 나에게는 맨 마지막에 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네가 열심히 일한 성과를 보고 그 이후에 내가 할 만큼 지원을 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하신 것 같다. 사랑하는 동생 세영이가 주관하는 행사에 전폭적인 지원을 보내주시는 형제애가 무척 감격스러웠다.
그 같은 후원 속에 우리는 마침내 대구국립극장에서 제2회 아남민국 모의국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게 되었다.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을 총망라하여, 고대가 정부 여당이 되고 타 대학이 야당이 되는 방식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님께서 직접 참석하시기로 약속되었으나 부득이한 국회 사정으로 불참하였고, 대신 조봉암(曹奉岩) 부의장님께서 상임위원장 등 여러분과 참석하셔서 축사를 하시고 우리를 격려해 주셨다.
한편 정주영 회장님께서는 행사 비용으로 거금을 찬조해 주시고, 행사 당일에는 다망(多忙)하신 중에도 부산에서 대구까지 오셔서 우리를 격려해 주셨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당시 대구에서 제일 큰 중국요리집에서 교수님 외에 백여 명의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시기도 하였다. 그때 우리들은 모두 감격하여, 불행했던 대학 생활의 한을 잠시나마 풀 수 있었다.
전쟁 중 피란 시절에 그렇게 성대히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정세영 형의 지도력과 의욕적 열성의 덕택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5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새삼 보람 있고 자랑스럽게 생각된다.

아호(雅號) 하나 없지만, 어떤 아호로도 부족했던 크나큰 사람

언젠가 하루는 계동(桂洞) 사무실에 들렀을 때였다. 이런저런 담소 끝에 나는 정 회장에게 이렇게 권했다.
“정 회장, 우리도 이제 나이가 이쯤 되었으니, 공식 호칭은 회장으로 하더라도, 사석(私席)에서 이름을 그대로 부르기는 좀 뭣하지 않아요? 그러니 운치 삼아 아호(雅號)를 하나 지어, 대인(對人) 이미지를 부드럽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정 회장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자네 같은 양반들이나 하게!”
나는 그래도 아쉬운 생각 때문에, 평소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당대의 명필(名筆)이요 한학자(漢學者)인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배에게 갔다. 나는 그 분에게 정세영 회장과 나눴던 대화의 취지를 설명한 후 아호를 지어 주십사 부탁하였고, 선배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선배는 심사숙고 끝에 자획(字劃)과 운세 등 전통적인 작법(作法)에 따라 ‘위산(爲山)’이라는 아호를 지은 후 해설까지 적어주었다.
그 길로 정 회장에게 가서 사연을 설명하자 한참을 묵묵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잘라 말했다.
“너무 커! 나에게는 너무 과해!”
그러자 나도 한 마디 응대를 했다.
“이 사람아, 형이 왜 작은가? 작은 것은 포니 자동차지! 자네야 아주 큰 리무진 자동차지!”
이렇게 말하고 서로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또 한 번은 현대가 정치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데다, 노사분규로 연일 시끄러울 때였다. 나는 위로차 정 회장의 사무실에 가서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얘기 도중에 정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요즘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실감나게 와 닿아요.”
‘상대방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는 그 말이 실감난다는 것은, 당시 어려움 속에서도 정치권이던 노동조합이던 모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사려 깊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에 큰 감명을 받았다.
나는 이 유명한 문구(文句)를 여초 김응현 선배의 명필에 담아 액자를 만들어서 정 회장에게 선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배에게 그 연유를 간곡히 설명했더니 쾌히 승낙하고 “그 출전(出典)은 <맹자(孟子)>이고, 원래 문구는 ‘역지개연(易地皆然)’인데, 근래에 와서 ‘역지사지’라고 통용(通用)한다”고 해설해 주었다. 여초는 성품이 강하고 자존심이 세서 어지간해서는 글씨를 안 써주지만, 정 회장과 나에게 그렇게 호감을 가져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글씨를 받아 표구(表具)를 해서 정 회장에게 선물했는데, 이후 정 회장의 마음을 담은 그 글씨는 계동 사무실 대기실 벽에 걸려있게 되었다.
언젠가 또 한 번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접견실과 집무실 사이 출입문에 모조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볼펜으로 쓴 글이 있었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물이 흐르는 것을 보라.
가다가
구덩이를 만나면 채우고
바위와 언덕을 만나면
끼고 돌아 흐른다.
참 나를 찾는 공부는
그와 같아야 한다.
- 대현(大賢) 큰스님 법어(法語)

나는 그 법어가 마음에 들어 메모를 하고, 정 회장에게 그 사연을 물었다. 그 법어에 대한 정 회장의 설명이 너무 진지하여, 나는 그 높은 뜻에 큰 감동을 받았다.
평소 그렇게도 단정(端正) 겸허하고 합리적이던 정 회장, 겉으로는 냉철하면서도 속 정(情)이 많아 주변의 어려운 친구며 친구 자녀들을 챙겨 보살펴 주던 다감한 정 회장! 이제 정 회장을 잃고 불러도 대답 없는 그를 그리워하며, 나는 홀로 노두(路頭)에 방황하는 것 같은 고독감을 느낀다.
정세영 형! 형을 추모함에 어찌 글자 몇 줄로 표현을 다하겠는가. 엎드려 명복(冥福)을 비오니 부디 평안히 영면(永眠)하기를, 삼가 합장(合掌)하여 빌고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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